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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서전] 후회없는 인생 [I.북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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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양 출생과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 명가촌의 장손 명재억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독자적인 권한이 박탈된 일본 제국의 영토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킨 후, 중화민국을 비롯한 대륙으로의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를 일제의 중국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인력과 물자를 공급하는 보급창고로 전락했음을 의미했다. 게다가 일제는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제거하여 완벽한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민족 말살 통치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나는 1932년 12월 2일 평양의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명재억, 어머니는 전봉란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오래 전, 나의 친할아버지 명은조는 평양에서 대동강을 따라 남쪽으로 약 10마일 떨어진 청룡이라는 마을에서 제법 큰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대대로 명가 자손들이 그곳에 살았기 때문에, 그 마을은 또한 ‘명가촌’이라고도 불렸다. 아담한 언덕 아래로 대동강 줄기가 평화롭게 흘러가고, 강가 양지 바른 곳에 형성된 마을에는 옹기종기 초가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마을 북쪽의 우거진 숲에서는 나무 사이로 자주 노루 가족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강물에는 물고기들이 풍부했다. 


원래 우리 조상들은 대동강 기슭에서 대대로 쌀과 옥수수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런데 미국 선교사들이 들여온 땅콩을 먹어보고, 땅콩 농사에 대해 알게 된 나의 증조 할머니께서는 모래사장으로 뒤덮인 대동강 기슭의 토양과 기후가 땅콩농사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셨다. 

게다가 모심기부터 추수와 탈곡까지 노동력과 시간이 많이 드는 쌀농사에 비하면 땅콩농사는 훨씬 수월한 편이었다. 여장부였던 나의 증조 할머니께서는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땅콩 종자를 들여 온 다음, 그 마을 최초로 땅콩밭을 만들고 땅콩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당시 땅콩 한 말 가격이 쌀 한 말 가격과 같았기에, 증조 할머니는 땅콩 농사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사업 수완이 뛰어나셨던 증조 할머니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소와 돼지 등 가축들을 들여와서 키우기 시작했고, 사슴 농장도 만드셨다. 

사슴농장에서 채취한 녹용들은 비싼 한약재료로 판매하여 큰 수익을 올리셨다. 증조 할머니는 진정 시대를 앞서 간 여성 사업가였다. 명가촌에서 증조할머니의 위상은 여황제와 같았고, 아들들은 절대적으로 어머니의 말씀에 복종했다. 


나의 아버지 명재억은 증조 할머니의 맏아들인 명은조 할아버지의 네 아들 중 장자였다. 전통에 따라 할아버지의 땅과 가업을 물려받아 부유한 지주의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태어난 땅에서 평생 농부로 사는 것에 관심이 없으셨다. 

대신 대학교육을 받아 농업과 관련된 전문지식을 습득한 후 한국의 농업기술을 향상시키고 농부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

는 것을 꿈꾸셨다.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자, 아버지는 열세 살의 나이에 가족들 몰래 집을 나와 정주로 떠나셨다고 한다. 그곳에 있는 오산학교에서 수학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 내려야 할 역을 놓친 바람에 10마일이 넘는 거리를다시 헤매며 걸어가던 일에 대해 뒷날 나에게 여러 번 들려주셨다. 한번도 밥을 굶어본 적 없는 지주의 아들에게, 추위와 배고픔과 어둠 속에서 걸어가던 그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덕분에 아버지는 안전한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처음으로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결국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평안북도 정주시에 도착하여 오산학교에 입학하실 수 있었다. 


오산학교가 있던 정주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교육도시로, 수많은 유명한 교육자들, 목사들,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 

나의 아버지는 오산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곳으로 가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다. 아버지는 오산학교가 있는 마을에 도착하자 사람들에게 자신이 청룡시의 지주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자기가 오산학교를 찾아온 이유를 밝히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그의 뜻을 가상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의 숙박과 학비 문제를 해결해주었다고 한다. 물론 아버지는 졸업하자마자 돈을 모두 갚기로 약속했다. 


아버지는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진 않으셨다. 그는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가서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하고 싶었다. 

그는 일본으로 날아가서 동경대학에서 농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미국과는 달리 당시 일본에서는 대학생이 학비를 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별로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의 숙부 중 한 분이 약간이나마 학비를 보내주셔서 그 돈으로 빠

듯하게 생활해야 했다. <다음주에 계속>


- 작가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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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평양에서 태어난 명인성 박사는 1948 년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후 남한에서 서 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 을 떠나 콜로라도 광업대학(Colorado School of Mines)을 졸업했다. 

미국 Raytheon Corporation의 자회사인 Seismograph Service Corporation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털사 대학교(University of Tulsa)에서 석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대한민국 포항의 유 전개발 프로젝트와 북한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 중국과 남미 등의 유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 면서, 민간 외교와 사회사업도 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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